인조의 나라
“역사 기술의 특권은 역사가에만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 단순히 사실만의 나열이 아니라 일정한 관점과 시각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과거라면 그런 체계를 재단하는 특권이 역사가에만 귀속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법조인이 조선 관련 역사서를 직접 발간해 주목을 끌고 있다. 김형진 변호사는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등 기존 사료는 물론 40여 편의 단행본과 60편의 논문을 섭렵하고 2년 만에 『인조의 나라』라는 책을 집필했다.
김변호사는 과거의 역사가 우리에게 유의미한 사건이 되려면 현재의 시각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평가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주자학이 지배한 조선 후기 사회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자신의 관점을 내세운다. 그는 상부구조인 주자학 이데올로기가 하부구조인 사회경제적 물적 기반의 변화를 막은 최초의 국가가 바로 조선이라고 진단한다.
조선 성리학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가능한 것은 김변호사가 오랫동안 공맹유학(孔孟儒學)은 물론 주자학·성리학에 관한 공부와 연구를 통해 내공을 쌓았기 때문이다. 역사 사실과 철학 개념이 접목된 그의 책은 일반 독자들에게 조선 후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조선 성리학에 대한 변변한 비판서가 아직 많지 않은 상황에서 연구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자극을 줄 것으로 본다.
저자는 무엇보다 강단 사학의 무기력과 매너리즘의 구체적인 사례로 최명길과 김상헌에 대한 평가를 들고 있다.
병자호란 이후 지난 3백 년간 척화파인 김상헌은 충절과 절의를 높인 인물로 존숭받지만 주화판인 최명길은 역적에 비유되어 소인배로 치부되어왔다. 최명길은 백두 간척의 위기 속에서 국가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주화론을 주장하며 화친을 성사시켰으나 조선 주자학자들은 그를 절의를 버린 사람으로 南宋의 진회를 빗대어 매국노라고 폄하했다. 최명길과 김상헌에 대한 편향적인 평가는 주자학에 매몰되었던 송시열 등 조선 후기 사대부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강단 사학자들은 두 사람의 행동이 각자 나라를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들이 나중에 서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억지로 화해시키는 표준 해석을 내놓고 있으나 김변호사는 양비론이나 양시론과 같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자신의 관점을 분명히 드러낸다. 김상헌은 절의와 존주대의와 같은 추상적 명분을 중시하며 현실을 도외시한 반면에 최명길은 주어진 여건과 상황 내에서 가능한 최적의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교조와 독단보다는 실용과 실사구시의 자세를 취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최명길은 권위가 확립된 사상이라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독립성과 함께 사상에 매몰되지 않은 융통성을 보여주었다”라면서“최명길의 확신과 실천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라고 평가한다.
저자는 인조반정을 조선 후기의 시발점으로 보고 16세기 말․17세기 초 세계정세와 함께 인조반정 전후 시기인 선조·광해군·인조·소현세자·효종 때의 주요 인물과 사건을 기술한다.
저자가 인조 시대를 주목한 것은 조선 후기가 그로부터 시작되었고 조선 후기를 규정한 정치적·사상적·경제적 구조의 원형이 구축된 시기로 봐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인조반정 주역들이 내건 정변의 명분과 뒤따른 행적이 조선과 세계의 간극을 벌리는 역사적 분기를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회복 불능의 괴리와 파행으로 이끌었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이다.
반정 후 집권 사대부들은 임란으로 황폐해진 국가를 발전지향의 선순환 궤도에 올려놓는 대신 현실 안주와 체제 고수를 택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절의론․조선중화론 같은 공허한 이데올로기를 배태한 추상적 관념 체계에 집착함으로써 창의적 사고와 실용적 실천의 싹을 잘라 버리는 악순환의 길로 치닫고 말았다. 이들의 선택은 병자호란이라는 미증유의 치욕을 불러왔고, 치욕에 대한 진솔한 반성과 대안 모색 대신 외부와 벽을 쌓아 세상의 변화를 외면하는 자폐적 봉쇄 국가의 길을 걷도록 만들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인조 재위 이후 조선 멸망에 이르는 250여 년은 국가 정향성과 진정방향이 정해진 시대이다”라면서 “인조 이후의 사회를 당쟁 격화와 사상투쟁의 소모적이고 공허한 연속으로 이어진 모태와 근간은 직접적으로 인조 시대로부터 비롯되었다"라고 단언한다.
인조는 재위 기간 내내 정국 운영에 있어 공신들에게만 의지하고 백성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정묘호란에서 병자호란 직전까지 물경 10년 동안 생부를 왕으로 추존하려는 원종추숭(元宗追崇) 문제에 매달리면서 신하 간, 붕당 간 불신의 벽을 높이고 국력을 갉아먹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안에 갇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척화(斥和)론자는 당당했고 주화(主和)론자는 죄인처럼 행동해야만 했다. 성리학자들은 척화론이라는 공론의 정당성을 의심치 않았다. 그들에게는 대의와 의리에 비추어 明에 대한 절대적 사대와 존승 말고 다른 길은 없었고 나라 안팎의 사정과 국력, 군사력과 관계없이 무조건 明을 따르고 淸을 배척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청 태종 홍타이지 앞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라는 치욕을 당한 것은 집권층의 무능과 파렴치, 몰지각, 부패에 더하여 공론을 장악한 식자층의 공허한 이데올로기가 결합된 최악의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백성의 안녕을 신장하고 질곡과 신산을 면하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의리는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척화파의 의리론이 바로 허위의식,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었다"라고 진단한다.
주자학이 조선 후기의 정치․경제․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면서 조선 후기에 이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부정적 유산을 남기고 있다.
정묘호란에서 병자호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조선의 최대 정치 현안은 군사․ 외교의 신장이나 세제 개혁 같은 사안이 아니라 원종추숭(元宗追崇) 문제였다. 반정 명분으로 내건 존주대의(尊周大義)는 삼전도 패전과 맞물려 대외교류와 국외 접촉을 스스로 차단하는 자해, 자폐적 세계관을 촉발시킨 시발점으로 작용했다.
허식적인 예에 집착한 성리학은 인조에 이어 효종 때에도 2차에 걸친 예송논쟁(禮訟論爭)을. 그리고 주자 견해의 고수 여부를 기준으로 사문난적(斯文亂賊) 분쟁을 불러오는 등 생산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무익한 설전과 실랑이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성리학이 유학자들이 조선에 유입시키고자 한 지적 토대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면 조선시대 예법은 왕과 사대부는 동일 계급, 사대부와 백성은 절대 구별이라는 신분 질서를 고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저자는 주자학 이데올로기를 조선에 적용하는 데 이바지한 결정적인 인물로 송시열을 지목한다,
송시열은 뛰어난 역량으로 이미 사대부가 공유하던 세계관과 가치관을 종합하여 형상화함으로써 조선 사회를 자신이 구성해낸 주자학 이데아의 포로로 만들었다. 송시열이 내세운 춘추대의와 절의론(節義論)·조선중화론(朝鮮中華論)은 정의의 표상이자 도덕의 최고 기준으로 그에 부합하는 행위는 곧바로 정의고 도덕이며, 이와 배치되는 행위는 불의와 부도덕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 사회는 실용과 실리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공리공담이 국가의 거대 담론을 주도하게 되어 미래를 향한 국가와 사회의 변증법적 발전은 이뤄지지 않고 결과적으로 자폐적 정신세계에 갇힌 채 전진력과 추진력을 상실한 무기력한 국가로 남게 되었다.
특히 주자학자 일부 세력이 독점한 절의와 도덕은 다른 집단에 대해서는 독단과 폭력으로 작용하고, 작용과 반작용을 거쳐 종래에는 사사로운 반감, 원한과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저자는 “조선 후기를 이념으로서의 성리학이 국가 전반에 걸쳐 현실화·육화된 시기”라고 규정하면서 “당시 시공간으로 들어가 사대부들의 동기와 의도, 지향점에 대해 가능한 긍정적 해석을 부여해보려는 노력은 한계에 도달했다"라고 토로한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은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국가란 무엇인가, 실용이나 명분이냐, 주자학이 현대에도 가능한 철학인지에 대해 자문하고 그 답을 이렇게 제시한다,
“국가의 역할과 장래에 대해 전반적 공유와 묵시적 합의를 갖는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언제든 국가는 위기에 빠질 수 있다. 언제든 위기의 순간이 오면. 우리가 원하는 국가는 어떤 모습이며, 어떤 방법과 수단으로 국익을 지키고 생존과 번영을 달성한 것인지 물을 것이고 거기에 답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 가치관의 우울한 그림자에서 벗어난 게 아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절의와 정의라는 명분이 국가 생존, 자유민주 기본질서 유지, 평화통일, 경제번영, 국위선양과 같은 국가 이익을 지키기 위한 최적의 목표이자 수단이라고 고집하는 완고함을 버려야 할 때가 됐다.”
“주자학이 정상적 의미의 학문이 아니라 단지 정쟁 도구, 적과 아군을 가르는 기준으로 전락한 상황에서 주자학의 부활은 과거의 복제 형태로는 안 된다. 도덕철학으로 유학은 인간에 대한 증진된 과학지식을 참고로 선의 의지를 고양하고, 자유를 기초로 선을 행하도록 도덕론을 정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에게 굴레를 씌우는 봉건적인 예론(禮論)을 배척하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성과 창의성을 북돋는 신개념 사회관계론을 지향해야 한다.”
저자는 “모든 역사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기술된 것이며 역사 기술의 기본 임무는 현재를 되돌아보고 반성할 계기를 부여하는 데 있다”라면서 “과거보다는 오히려 현재를 진단하고 교정하는 데 이 책이 도움 되기를 바란다.” 고 소망을 밝힌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여러 방면에서 과거를 답습하는 기조가 엿보이는 가운데 이분법과 편갈림이라는 그릇된 역사의 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에게 『인조의 나라』라는 책은 큰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있어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고자 하는 모두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김형진 지음/ 새로운 사람들
[백재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