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14-1 코스(저지마을-오설록녹차밭)

백재선 기자의 여행길 이야기

제주 올레 14-1 코스(저지마을-오설록녹차밭)

백재선 / 전임기자

제주 올레 14-1코스는 14코스 시발점인 저지마을 정보화 센터에서 시작한다. 14-1코스는 14코스와 달리 큰 도로를 건너 저지 오름을 등지고 민가 쪽으로 향한다.


민가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걸으니 특이하게 삼각형 구조물의 「아트 카페 쌤」이 눈에 들어왔다. 부지도 넓고 여러 채의 건물이 있는 것으로 보니 공연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돌담 사이로 난 길을 지나니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이라는 입간판이 나왔다. 예술인 마을 입구에는 오래전에 물통으로 쓰였던 알못 습지가 보였다.

 

 




올레길에는 민가나 사람은 보이지 않고 귤 농장과 밭만 보였다. 「남양홍씨 종친회공원묘지」라는 커다란 안내석이 우뚝 서 있다. 검은 돌담 안에 묘역들이 가지런히 조성되어 있다. 제주도 사람들은 육지 사람들보다 조상을 모시는 데 더욱 정성을 쏟는 것 같다.

 

 




올레길을 걷는데 농장에서 음악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음악 향기 머금은 고당도 천혜향을 재배하는 「우영밭 농장」이라는 안내 간판이 보였다.

 

 




글쎄 동물을 사육하는 농장에서 음악을 들려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귤 농장에서 음악을 들려준다는 이야기는 너무 생소했다. 게다가 들리는 음악은 조용한 음악은 아니고 경쾌하지만 다소 시끄럽기만 했다.


저지리 마을 안내판이 나왔다. 저지리 마을은 현경면에 있는 마을 중 가장 고지대에 위치하여 한라산에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한다. 약 4백 년 전에 전주 이씨가 처음으로 정착한 이래 주민들은 중산간 지역이라는 지리적인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과수원과 밭을 개척해 오늘의 마을을 일구어냈다.

 

 




민가와 밭을 지나 너른 숲을 만났다. 올레길은 「저지 곶자왈 연구 시험림」 사이로 낸 넓은 임도로 연결된다. 곶자왈은 오름의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용암대지 위에 만들어진 천연 숲이다. 곶은 산 밑의 숲이 우거진 곳을 의미하며 자왈은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수풀처럼 어수선하게 된 곳을 뜻한다.

 

 




저지 곶자왈은 현경면 월림-신평 곶자왈 지대 중에서 가장 식생 상태가 양호한 지역으로 녹나뭇과의 상록 활엽수들이 곶자왈 숲을 풍성하게 이루고 있다. 후박나무‧참식나무 등 녹나뭇과 상록수들은 벌채된 뒤에도 다시 맹아가 자라나 숲을 울창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울창한 활엽수림 아래에는 고사리와 더부살이 등 양치류 식물이 바닥에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올레길을 걷고 있으니 숲속에서 이름을 모르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 출입이 금지된 숲은 새들에게 최상의 안식처를 제공해 주고 있는 셈이다.

 

 




올레길 양쪽으로 숲이 우거졌지만 임도 길이 워낙 넓어 햇빛을 가릴 수 없었다. 그러나 길이 평평해 걷기는 아주 수월했다. 다소 덥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길 한가운데 큰 나무 아래 쉼터가 나왔다.

 

 




쉼터에 앉아 물을 들이켜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말 두 마리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말들은 전혀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쉼터에서 일어나 다시 걸으니 말 사육 농장이 보이고 올레길은 「문도지 오름」 입구에 이른다. 문도지 오름 오르는 길은 처음에는 가팔랐지만 이어 완만해졌다.

 

 




오름길 왼쪽으로 제주 서부지역 크고 작은 오름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날이 흐려서인지 한라산은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오름 정상에는 말 몇 마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마침내 오름 정상에 이르니 사방을 둘러볼 수 있었다. 가까이 서쪽 해안으로 한림읍과 현경면에 있는 포구들이, 남쪽으로 모슬봉과 산방산이, 그리고 동쪽으로 한라산으로 이어지는 크고 작은 오름과 울창한 숲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지 곶자왈에서 한라산에 이르는 지역 일대가 온통 거대한 숲을 이뤄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처럼 개발에 휩싸이지 않은 울창한 산림이 제주도를 살리는 허파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가나 인공 시설이 전혀 보이지 않은 장대한 숲을 보니 가슴이 탁 트이고 황홀감마저 느껴졌다. 나 자신이 대자연 속에 파묻혀 있어 일순간 자연과 혼연일체가 된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온함에 그냥 이곳에서 계속 머물고 싶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옆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말들에게 다가섰다. 가까이 접근하니 말들이 나를 쳐다보면서 경계하는 듯했지만, 곧바로 회피해버렸다. 말들은 고삐에 매이지 않고 그냥 방목된 상태이지만 전혀 사람들에게 위협을 주지 않았다.

 

  




말들과 작별하고 나서 오름에서 내려왔다. 내리막길이 끝나는 지점에 중간점 스탬프를 찍었다. 올레길은 계속 곶자왈 숲을 지난다. 바닥은 용암 바위와 돌이 깔리고 양서류 식물이 틈틈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전형적인 곶자왈 지역이다.

 

  




올레길 한쪽에 「제주백서향군락 보호지역」이라는 안내판이 나오고 안쪽에는 거북선을 비롯해 다양한 선박 모형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숲속에 선박 모형을 왜 전시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올레길에서 11코스 신평 곶자왈 숲을 지난 적이 있지만 저지 곶자왈은 신평 곶자왈보다 훨씬 규모가 큰 지역이다. 돌담이 둘러치고 움푹 파진 동굴 지역이 보였다. 「볏바른궤」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볏바른궤는 곶자왈 지역에 형성된 터널형 용암동굴로 여러 개의 가지 굴이 서로 이어져 있어 아주 오랜 적에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최근 4.3 사건 때에는 군경에 쫓겨 피난민들이 몸을 숨긴 피신처로 활용되기도 했다. 숲은 우거졌지만 바닥은 온통 현무암 바위와 돌이 깔린 지역에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며 목숨을 부지해야 했던 당시 양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올레길 바닥에 여기저기는 말똥이 널려 있었다. 말들을 통행시키는 출입문이 있고 철조망과 펜스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니 곶자왈 숲속에서도 말들을 방목시키는 것 같았다. 오름 지역도 아닌 곶자왈 지역에 말들이 먹는 풀이 있을까 궁금하기만 했다.

 

  




올레길은 곶자왈에서 나오자 초록색으로 덮인 「오설록 녹차밭」으로 연결된다. 오설록 녹차밭이 14-1코스 종점이다.

 

  




그동안 제주에 오면서 여러 차례 「오설록 티 뮤지엄」에 온 적이 있지만, 이 지역이 곶자왈 지역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올레길을 걷기 전에는 곶자왈 지역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설록 녹차밭 차밭 주변 지역을 보니 현무암과 양서류 식물이 여기저기에 깔린 것을 보니 곶자왈 지역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14-1코스는 거리가 짧아 당초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넓은 저지 곶자왈을 관통하고 나서 곶자왈 한 군데에 있는 문도지 오름 정상에 오르자 나 자신의 짧은 생각을 탓해야만 했다.


문도지 오름 정상에서 한라산에 이르는 광대한 숲을 보니 주위에서 한가로이 노닐고 있는 말과 같이 머물고 싶어 내려가기가 싫었다. 일찍이 유유자적한 삶을 설파한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의 미학이 떠올랐다. 짧은 시간이나만 주변의 자연과 한 몸이 되어 한가롭게 거닐며 즐기면서 자신의 번뇌와 세속의 근심에서 벗어나 영혼의 자유를 만끽하는 것은 올레길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이었다.

 

  

 (2023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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