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요구 거세지는 페루, 우리에겐 기시감
| 개헌요구 거세지는 페루, 우리에겐 기시감 |
| 명분약한 대통령 끌어내리기에 국민적 분노 |
| 헌법재판소는 탄핵 재판 회피 |
페루의 헌정이 뒤흔들리고 있다. 이 달 들어 페루 국민들은 세 번째 대통령을 맞고 있다. 격렬했던 시민들의 시위는 잠시 소강상태이지만, 불만은 여전히 높은 상태다. 언제 다시 점화될지 알 수 없다. 개헌을 요구하는 시민들, 이 과정은 지난 20년 우리 정치사를 부분 부분 복원해놓은 것 같은 착각까지 들게 한다.
사건의 발단은 탄핵이다. 지난 9일 페루 의회는 비스카라(Vizcarra) 임시 대통령을 탄핵했다. 페루는 내년 6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데, 비스카라는 그 동안 임시대통령직을 맡고 있었다. 탄핵의 이유는 이른바 ‘영구적 도덕적 실격’이라는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것이었는데, 이는 어느 한 때라도 도덕적 하자가 발생한 사람은 공직에 있을 수 없다는 독특한 법률조항이다. 하지만 이 조항은 지난 19세기 규정되었던 것으로 이미 페루에서는 잊혀진 법률이나 다름 없었다.
의회는 비스카라 전 대통령이 수 년 전 작은 지방의 주지사로 있을 당시 두 건의 건설계약과 맞바꾸는 조건으로 63만 미 달러 금액의 뇌물을 수수했다고 고발했다. 이것이 ‘영구적 도덕적 실격’ 조항을 위배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앞서 지난 9월에도 페루 의회는 탄핵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바가 있다. 당시 이유는 대통령이 자기 친구를 정부 부처에 취업할 수 있도록 선처했다는 검찰의 조사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메리노(Merino) 국회 의장이 대통령을 쫒아낼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군부 사령관들을 만났었다는 사실이 언론에 의해 폭로되면서 충분한 탄핵 찬성표를 확보하지 못해 불발됐다. 어쨌든 의회의 대통령 탄핵시도가 끈질겼던 셈이다.
뚜렷한 명분 없이 과거지사를 이유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던 비스카라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현실화되자 국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 점은 우리에게 첫 번째 기시감이다. 우리에게도 국회가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하자, 전 국민적인 반발이 일었던 적이 있다. 페루 국민들의 반발은 그 닮음 꼴이다.
탄핵과 더불어 메리노 국회의장이 임시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것이 국민들의 분노에 불을 당기는 계기가 됐다.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는 매일같이 시위가 발생했다. 우리로 말하자면 80년대 말 시청앞 광장이랄 수 있는 산 마르띤(San Martin) 광장에 연일 수천명이 모여 메리노의 퇴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시위의 진압과정은 우리의 80년대를 방불케했다. 최루탄이 발사되고 고무탄과 헬기등 모든 진압장비들이 동원됐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두 젊은이들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소뗄로 카마르고(Sotelo Camargo, 24세)와 삔따도 산체스(Pintado Sanchez, 22세), 이 두 젊은이의 사망으로 시위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치달았다. 결국 메리노 임시 대통령은 취임 6일만인 15일 다시 사임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젊은이의 죽음, 그 희생 위에 이루어지는 정치적 진전은 우리에게 두 번째 기시감이다. 80년대 말 우리에게도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나라의 경우 두 차례 국회에 의한 대통령 탄핵과정을 거친 바 있다. 그리고 그 최후의 판단은 언제나 헌법재판소의 몫이었다. 하지만 페루는 조금 다른 양상이다. 비스카라 전임 대통령에 대해서는 사실 아직 유죄여부조차 판결되지 않은 상태이다. 게다가 페루 헌법재판소는 2대 2의 표결로 자신들은 대통령의 탄핵에 대해 판단을 내놓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것이 페루 국민들로 하여금 개헌을 요구토록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비스카라 전 대통령은 자신의 혐의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혐의에 대한 판결이 있기도 전에 탄핵이 먼저 이루어진 셈이다. 또한 비스카라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요구하고 있다. 판결은 없는 상태에서 탄핵은 이루어졌다. 이런 헌법을 수용치 못하겠다는 국민적 요구가 일견 납득이 된다.
사실 현재 페루의 헌법은 1993년 당시 알베르또 후지모리(Alberto Fujimori) 대통령이 연임을 위해 군부 친위쿠데타를 동원해 제정한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국민들이 헌법에 대해 마뜩치 않아 하던 상황에서 지금과 같은 사태를 맞게 되면서 페루의 헌정이 뒤흔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랄 수 있다.
페루 의회의 부패상 또한 국민들의 공분을 일으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절반 이상의 의원들이 뇌물에서 심지어는 살인에 이르기까지 각종 부정내지는 범죄에 연루되어 있는 것으로 페루 국민들은 파악하고 있다. 이런 의회가 대통령을 탄핵했으니 국민들이 쉽게 받아드릴 리 만무하다. 무능한 국회의원, 타락한 국회의원들의 집요한 대통령 흠집내기,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다지만, 이 또한 우리에게는 세 번째 기시감이자 현실이다.
이런 와중에 프란시스꼬 사가스띠(Francisco Sagasti) 신임 대통령은 내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 집중해달라는 메시지를 내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눈은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 향후 추이가 주목된다.
산 마르띤 광장에 모인 페루의 국민들, 이번 시위는 특히 젊은이들이 절대적인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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